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간 나오토 (문단 편집) === 지지율 하락과 퇴진 === 지진 이후 내각 지지율은 20%대 이하로 급락하며 자민당, 공명당은 [[중의원]]을 해산하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즉 '''총리직 사임과, 중의원 해산을 속행하지 않을 시엔 너희가 추진하는 정책은 다 반대할 거임!'''이라는 으름장을 놓았다.[* 2011년 예산안은 일단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정치권의 극한 대립은 피하자는 여론에 야당이 응하면서 가까스로 통과되었다.] 이렇게 되자 간 나오토 총리는 화살을 [[오자와 이치로]]에게 돌리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정치자금 문제로 강제 기소된 오자와 이치로 전 대표의 당원권을 정지하고 탈당을 압박했던 것. 간 총리는 심지어 의회 해산 카드도 슬쩍 내보이는 상황인데 한마디로 '''"날 건들면 의회를 해산해 버리겠어. 너희들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와 같은 협박인 셈. 잠시 상황이 반대로 됐다. 그러나 오자와 계파가 따로 [[자유당(일본, 2016년)|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면서 간 총리의 퇴진을 압박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렇게 동력이 빠진 상태에서 센가쿠에서의 [[중국]]과의 갈등(2010년 9월), [[후텐마 기지]]에서의 미국 요구 수용(2011년 5월), 그 외 [[러시아]] 북방 4도 굴욕 등 매번 상대국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약한 일본"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로서 친미 기조에서 탈피해 한중일 경제 공동체를 하자던 하토야마의 꿈은 좌절되었다. '''또, [[2010년]] 제2사분기에 중국의 경제 규모가 세계 2위였던 일본을 추월하면서 1989년 소련을 추월한 이후 21년 만에 3위로 하락하여, 추락하는 일본의 한가운데에 있게 되었다.'''[* 여담으로 중국은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을 통해 이를 과시한 바 있다.] 하지만 그래도 [[간 나오토 담화]][[http://ko.wikipedia.org/wiki/%EC%9D%BC%ED%95%9C%EB%B3%91%ED%95%A9_100%EB%85%84%EC%97%90_%EC%A6%88%EC%9D%8C%ED%95%9C_%EC%B4%9D%EB%A6%AC_%EB%8B%B4%ED%99%94|# 위백항목]]에서 자국 내의 비판을 무릅쓰고 '''우회적으로 국권 침탈의 강제성을 인정했으며''' 의궤 반환을 추진하였다. '''이런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도 사회당의 무라야마 이래 처음이다.''' 그래도 개념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자위대]] 파병 발언을 했다가 [[긁어 부스럼]]으로 작용해 쌓아왔던 점수를 다 깎아먹었지만.. '''최근 10여 년간의 [[한일관계]]에서 간 총리 재임기간 동안의 한일관계가 가장 원만했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2011년 6월 2일에 재해 복구가 대략 마무리되면 퇴진하기로 발표하였다.[[http://media.daum.net/foreign/view.html?cateid=1046&newsid=20110602122015221&p=yonhap|#]] 자민당, 공명당의 내각 불신임안 제출에 대한 일종의 고육지책으로 평가받는데, 이 고육지책이 통했는지 당일 오후 2시[[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5094635?sid=104|관련기사]]에 열린 일본 [[중의원]]의 내각 불신임안 표결 결과 찬성 152 대 반대 293표로 부결되었다. 불신임안이 부결된 것은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가 간 나오토 총리의 편을 들면서[* 하토야마 전 총리와 민주당을 깨지 않는다, 자민당에 정권을 내주지 않는다, 대지진 부흥 기본법과 2차 추경 예산 조기 편성을 추진한다는 합의가 있었다고 한다.] [[오자와 이치로]] 전 간사장 쪽도 대놓고 반대를 할 수 없었고, 자진 퇴임 정도면 모양새도 좋다고 생각해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 (그러니까, 민주당 의원 대략 전체가 반대했다.) 또한 일본 국민들이 '''"지진과 원전으로 난리 난 판국에 권력 다툼을 하고 싶냐"'''라고 부정적 여론을 내비친 것도 영향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간 총리가 사임 의사를 표명한 만큼 6월 국회를 마무리하고 사임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올 연말까지는 총리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발언해 사실상 조기 퇴진 의사를 철회하였다.[* 정확히는 후쿠시마 원전의 냉온정지가 완료되는 시점이라고 했는데, 저게 2011년 12월 말이나 다음 해 1월 초로 예정된 것이다.] 거기에 9월에 있는 유엔 총회에서 "탈 원전 기조"에 대한 연설을 하기 위한 연설문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거기다가 재해 복구를 지원하기 위해 정기국회의 회기를 올해 말까지 연장하겠다고 밝혔다. 내각 불신임안을 [[일사부재의 원칙|한 국회 회기에 두 번 이상 할 수 없는 법]]을 노린 것이다. 이에 하토야마 전 총리가 '''사기꾼!'''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 때문에 하토야마 전 총리와 오자와 전 간사장은 간 총리의 조기 퇴진을 위해 연대하기로 합의했다. 상황이 이리 흘러간 탓인지 간 총리는 다시 여름이 끝나기 전, 즉 8월 말의 정기국회 회기까지 2차 추경예산과 재해복구기본법, 전력회사가 자연에너지 발전을 사들이는 재생에너지특별조치법안, 올해 예산에 편성된 국채발행을 가능하게 하는 특별공채법안을 처리하고 퇴진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여하간 일본 내에서도 '경이적인 끈기'라고 표현할만큼 끈질긴 버팅기기 덕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이래 가장 오래 총리를 한(.../1년 3개월) 인물이 되었다. 그래봐야 3달 더 한거지만 말이다. 8월 초에 접어들자 지지율이 '''15%로''' 민주당 집권 이후 최저가 되어 버렸고,(그나마 다행인 건 아무리 지지율이 폭락해도 [[모리 요시로]]의 '''5.7%''' 기록에는 한참 못 미친다는 점이다.) [[노다 요시히코]] 재무상,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상 등이 총리 레이스에 뛰어들기로 공식 발표하면서 결국 2011년 8월 29일에 민주당 대표 경선이 열리기로 확정되었다. 당초 유력한 주자로 거론되던 노다 요시히코가 증세론 때문에 지지율이 오르지 않으면서 결국 오자와계를 이길 후보로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무장관이 거론된 끝에 대표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현재의 분위기로는 마에하라 전 장관이 사실상 차기 총리로 유력하다는게 대체적인 견해였으나 여론의 지지와는 달리 당내에서의 부정적 분위기로 마에하라 전 장관은 낙마했고 보수적인 노다 요시히코가 당선되었다. 2011년 8월 26일, 자신이 공약한 '''퇴진 3조건'''인 2차 보정 예산안, 특례공채법안, 재생에너지 특별법안이 중참 양원에서 통과되면서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의를 표명했다. 8월 30일 대표 선거에서 당선된 [[노다 요시히코]] 신임 대표가 중참 양원에서 신임 총리로 당선되면서 [[2011년]] [[9월 2일]]을 끝으로 파란만장했던 간 총리 내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총 재임기간은 452일.'''[[https://news.v.daum.net/v/20110902103259738|해당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